에세이) 기계식 키보드와 익숙함
기계식 키보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저렴한 10만원대 이하의 물건도 많지만 쓸만한 기계식 키보드는 보통 10만원이 넘는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마니아의 세계에서는 고가 기계식 키보드도 상당히 많다. 사실 키보드를 10만원이나 주고 구매한다는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임할 때 키보드의 맛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일할 때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기계식 키보드에 대한 궁금증과 나름 두둑한 지갑에 기계식 키보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름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기계식 키보드를 큰맘먹고 나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약 15만원 상당의 녀석을 구매했고 물건을 배송 받았다.
기계식 키보드의 첫 느낌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통통 울리는 통울림이 미세하게 있어 신경이 쓰였고, 기존에 쓰던 키보드보다 높이가 좀 있어 손목이 불편했다. 약 2만원 상당의 손목 받침대를 구매해 손목이 좀 편해지긴 했지만 왜 사람들이 기계식 키보드에 열광하고 사용하는 것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비싼 돈주고 구매한 키보드를 방치하자니 뭔가 아깝기도 하고 그냥 재택 근무 중에 사용했다. 그렇게 한두달쯤 계속 재택 근무가 이어졌고 나는 기계식 키보드를 무의식 중에 사용했다.
코로나로 재택 근무 기간은 늘어났다. 약 2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자연스럽게 기계식 키보드를 2달 정도 사용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잠잠해져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업무를 보다가 이메일을 작성하는데, 어라? 키보드가 엄청 뻑뻑하고 불편하다. 기존 키보드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하기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기존 키보드의 불편함을 이제서야 알게됐다. 기존 키보드도 나름 브랜드가 있는 키보드지만 타자를 누를 때 손가락에 힘이 상당히 들어가고 뻑뻑하게 느껴졌다. 이 어색함에 적응하기가 힘들 정도다.
아! 이래서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하는 거구나! 그제서야 기계식 키보드가 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서야 기계식 키보드가 선녀로 보인다.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타건감과 자연스러움은 기존의 키보드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난 이미 기계식 키보드의 맛에 빠져있었다.
기존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나 기계식 키보드를 두 달 정도 사용하고 나니 기존 키보드를 더 이상 사용하기가 힘들어졌다. 기계식 키보드에 익숙해져버린 내 손의 감각이 오랜 기간 나와 함께 했던 기존 키보드를 밀어내고 있었다.
익숙함이란 참 무섭다. 기존 키보드를 사용할 때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기계식 키보드에 익숙해져버린 내 손의 감각이 기존의 불편함을 거부한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물건에 서서히 적응하고 변화를 거부한다. 더 좋은 것, 더 넓은 집,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기존의 불편함을 거부하는 우리만의 적응 방식이 아닌가 싶다.